돈암서원 소개

소개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 기호문화의 성지, 돈암서원



문화재 : 서원 

분류 : 사적 제 383호(1993년 10월 18일)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돈암서원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타계한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 충청도 연산현(連山縣)의 임리(林里)에 창건되었다.[249 번지] 창건시 김장생을 주향으로 모셨고 1658년(효종 9)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배하였다. 이어 1688년(숙종 14)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宋浚吉), 169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하였다. 처음에는 김장생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원래는 현재 위치에 보다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하임리 숲말로 연산천 가까운 저지대였는데 1880년(고종17) 홍수를 피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660년(현종 원년)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서원이 처음 입지 한 숲말 산기슭의 큰 바위를 돈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의 이름을 따서 사액을 받았다고 알려져있지만, ‘돈암’의 돈은 원래 ‘둔(遯)’자로 주역의 둔괘遯卦의 의미와 관련이 깊으며 주자가 만년에 사용한 둔옹(遯翁)이라는 호를 가탁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871년(고종 8)의 전국적 서원 훼철령에서도 철폐되지 않고 보존되었지만 1881년(고종 18)에 이르러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서원 뜰 앞까지 물이 차므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돈암서원의 배치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두고, 후면에 묘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식 배치이며, 전면에서부터 산앙루,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가 중심 축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응도당, 동서재,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크게 묘당(廟堂), 강학(講學), 유식(遊息), 수직(守直)의 4개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가장 중요한 묘당 구역은 제일 안쪽이자 서원 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주위에는 사괴석 담으로 둘러져있다.

강학 구역에는 강당인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해 두었다. 윈래 돈암서원의 옛터에는 응도당이 강당이었으나, 이건(移建) 과정에서 양성당이 먼저 강당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앙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배열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당의 서편으로는 판각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께서 강학하시던 공간인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다.

돈암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 구역은 서원의 북편에 배치하고 있다. 하나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경회당과 담장과 협문을 지나 제향을 준비하거나 제기 등을 보관해 두는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은 원래 수직사로 사용하다가 경회당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용도로 변경되고, 입덕문 앞에 산앙루(山仰樓)를 건립하면서 유식(遊息)공간을 만들었다. 

돈암서원은 호서는 물론 기호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서 사계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 가장 비중있고 영향력있는 서원으로 인정받았으며, 기호사림전체의 구심체가 되었다.